2000년 전 예수의 '선포'에 힘이 있던 이유는 그 말의 현존성 때문이다. 구약시대 '야훼'는 섬김의 대상이요 두려움의 대상이며, 인민의 보호자로서 존재 하였다면 예수의 탄생과 그의 <말>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한 일종의 <흐름>이었다. 그래서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곳에 모였으며 그들을 거듭나게 함으로 누구도 어찌하지 못하는 움직임을 만들었다.
로마의 긴장은 거기서부터 출발 한다.
사실 로마는 그의 움직임을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정치와 종교가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폭압>에 눌려 있던 낮은 곳의 그이들 역시 예수를 자신들을 로마의 폭정으로부터 구원 할 <왕>으로 여겼을 터다. 그것이 로마는 두려웠고 그것이 대중을 따르게 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왕 예수는 십자가에 정치범의 신분으로 초라하게 처형당했다.
그렇다. 예수에게 붙어 있던 <정치의 꼬리표>는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 낮은 곳에 흘러 들었던 그 흐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부활>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살아서 지금까지 가장 낮은 곳에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살아 있다. 이것이 <현존성>이다. 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흐름>이 없었다면, 예수가 당시 정치적으로 살았다면 그를 둘러싼 사건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작금의 시대를 본다.
예수 당시, <정치와 종교>가 명확히 분리되지 않은 시대였다면, 현대는 <정치와 경제>가 명확히 분리되지 않은 시대다. 현대는 돈을 신으로 모시는 시대인 것이다. 예수 당시 로마를 가장 무섭게 했던 흐름이 <예수>였다면, 현대는 돈의 <분배>다. 당시 로마는 자신들의 통치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적 틀을 교묘하게 이용해 왔었다. 그 일을 앞장서 도왔던 이들이 바로 율법과 교회의 권위로 중무장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것을 지키는 동시에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새로운 세력을 누구보다 열심히 해치워 나갔다. 예수도 거기에 있었다. 이러한 흔적은 신약성경 여러 곳에 너무도 쉽게 보이는 광경이다. 현대에 와서는 자신들의 권력을 적절히 유지하기 위해 경제를 교묘히 활용한다. 예수 당시와 비교해 종교가 돈으로 바뀌었을 뿐 벌어지고 있는 모습들은 너무도 똑같다. 한 국가 내에서도 그렇고 국제적 환경 속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희망을 본다.
예수 당시, 변화의 시작은 낮은 곳이었다. 그 곳에서의 <흐름>은 대 제국 로마를 떨게 했고 낮은 곳으로부터의 요구를 스스로 수용하게 하였다. 언제나 그 흐름은 <현존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유사이래 위로부터의 변화는 쉽게 그 색을 잃어 왔다. 예외 없이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낮은 곳에 있는 절박함이, 삶의 고단함이, 현실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낮은 곳의 <흐름>은 정치가 아니다. 그저 어찌하지 못하는 거대한 흐름일 뿐이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야와 여, 이러한 편가름의 대결구도를 넘어서는 근원적 요구이다.
단순한 생각일지 모른다.
무식하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를 무시하고 어찌 우리의 삶을 이야기 하느냐 꼬집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형식을 빌어 볼 때 언제나 낮은 곳의 흐름과 가까왔 던 것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 가진자의 탐욕과 권력의 오만과 세계질서의 패권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