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물 위에 사람의 몸이 뜬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수영을 하지 는 못한다. 이처럼 사실을 아는 것 만으로 누구나 물에 뛰어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깊은 물에 몸을 던질 수 있기 까지는 물이 사람의 몸을 뜨게 한다는 직접적 체험을 통한 <믿음>이 생기기 까지 절대적 체험 기간이 필요하다. 그것에 근거하지 않고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극복하고 물 속에 뛰어 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렇듯 체험 없는 이론 만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는 무수히 많다.
자전거를 타는 일도 그렇다. 처음 자전거를 배우기 위해서는 믿을 만한 조력자가 필요하다. 뒤에서 잡아 주던 그 손이 자전거를 잡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몸을 통해 체험하지 않고는 결코 홀로 설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일단 넘어지지 않는 다는 확신이 생기면, 두려움은 즐거움으로 변하며 그 확신은 평생을 가도록 잊혀지지 않는 체화 된 능력이 된다. 이것이 체험적 믿음의 힘일 것이다.
이렇듯 체험적 믿음은 머리로 알고 다짐하는 이성적 믿음이라기 보다 몸으로 느껴 체득 된 실존적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의 구석구석 골격과 근육이 머리보다 먼저 그 믿음을 기억하고 반응하는 반사적 행동처럼 말이다. 흔히 체험적 믿음을 생각할 때, 겪어 보고 아니면, 믿지 못하겠다는 조건부의 믿음을 상상할지 모르겠다.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식의 믿음 말이다. 이러한 믿음은 마치 처음 물에 뛰어들고는 몸이 물에 뜨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자전거를 처음 타보고는 홀로 설 수 없다 결론짓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단순히 인과적 확인을 통한 확신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과학처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만 믿은 것과 같은 믿음을 말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실험을 통해 얻어진 믿음은 <믿음>이라기 보다는 <지식>에 가까우니 말이다.
실험과정은 체험의 과정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실험과정은 수영을 배우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 처럼 나의 경험이 누락되어 있는 단순한 사실에 불과하기 때문에 체험적 믿음의 범주에는 들지 못한다 하겠다. 성경에선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장1절>"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믿음은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며, 현재는 실체가 없지만 결국 이루어 져서 그 결과가 <증거>로 나타날 것이라 말한다. 주체가 바로 <나>인 것이다. 나의 경험과 확신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어떤 이들은 '무조건적으로 믿어라, 그렇게 될 테니...'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맹목적 신앙을 강요하기도 한다. 물론 무조건적 소망(어떤 일을 바람)을 가지는 것은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더욱 더 강력한 믿음은 내가 믿으려 하는 것의 증거들을 체화 하는 것 일게다. 강력하게 믿음을 지키려는 의지는 결국 인간의 의지에만 기대는 그리 강력하지 못한 처사인 것이다. 마치 사람의 몸이 물에 뜰 수 있다는 믿음 혹은 신념만을 가지고 물에 처음 뛰어드는 것 처럼 말이다.
정말로 물에 몸이 뜨는 것을 경험하는 것,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체험적 믿음의 증거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머리로 그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다. '믿으면, 이루어 질 수 있다던데...' 혹은 '반듯이 그럴 거야'처럼 막연함에 근거한 믿음은 엄밀히 말하면 의지적 표현일 뿐이며 종말론적 결과는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의 의지에 기대어 연명하는 믿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으며 심지어 사라질 수 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는 교회를 거부한다. 결과로서의 그 무조건적인 믿음은 맹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체험적 믿음은 신념을 넘어선 것이다. 체험적 믿음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원시적 시원에 다가서는 일 일수도 있다. 이성과 논리를 주관하는 뇌작용을 통한 세상보기가 아니라 무조건적 반사를 관장하는 원시뇌의 작용처럼 반응하는 그 무엇을 바라는 것 이기에 그러하다.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강요하는 것과 완전히 내 것이 되도록 체득해 가는 것은 그래서 다르다. 아주 어릴 적 자전거를 배운 후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난 여전히 자전거를 탈 줄 안다. 탈줄 알아야 한다는 정신적 강요 없이도 말이다. 그것은 그냥 되는 것이다. <믿음>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